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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9 지금은 마음껏 후회할 때 - Knowing Me, Knowing You

 지난 목요일이었다. 나는 학교를 향하는 길, 300번 버스 맨뒷자리에 앉아서 전공 리딩 패키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 날은 전공 과목의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고, 나는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PC 앞에 앉아 발표와 함께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작성에 매달렸었다. 보고서를 쓰느라 정작 발표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고, 버스 안에 앉아서라도 살펴보던 참이었다.

 ‘영어로 발표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슬라이드 앞에서 어떤 말을 할지 이렇게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될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읽던 교재에서 눈을 떼어 무심코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때였다. 한 여성이 내 시야에 들어왔고, 내 주변의 시간은 갑자기 멈춘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리는 문 바로 옆 자리에서 파란색 코트를 입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내리는 문은 닫혔고 버스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창 밖으로 비친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서야, 내 주변의 시간은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뒷모습과 옆모습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절의 N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N은 아니었다. N일리가 없다고, 내 머리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N이 이런 곳에 있을 가능성이 희박할 뿐더러, 그녀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N의 마지막 모습과는 사뭇달랐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놀랄만큼 닮았던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절의 N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본 그녀의 모습은 결코 현재의 N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N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이후에도 우연히 한번 N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한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라는 노래 가사처럼, 내 모습만 돌아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지금의 N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절의 모습도 아니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도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단지 겉모습 뿐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오히려 ‘진짜 N을 마주쳤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N의 모습은 어떤 시간 속에서 멈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는 내 모습 또한 멈춰 있을 것이라고.

 그로부터 만 하루가 더 지난 금요일 저녁, 회의를 마친 뒤 자연스레 이어진 술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뮤지컬 맘마미아의 노래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맘마미아’의 뮤지컬 넘버 중에서 최고의 곡이 ‘The Winner Takes it All(이긴 사람만이)’나 ‘Thank You For The Music’이란 데엔 이견이 없지만, 누군가 내게 추천하고픈 한 곡을 꼽아달라고 한다면 아마 ‘Slipping Through My Fingers(내 손에서 빠져 나갔어)’나 ‘Knowing Me, Knowing You(나는 나, 너는 너)’를 선택할 것이다. 공연장에서 매일 맘마미아를 보고 듣던 때, 나는 샘을 연기하는 성기윤의 목소리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샘이 부르는 맘마미아의 노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곡은 단연코 샘의 유일한 솔로곡, ‘나는 나, 너는 너’였다.

 맘마미아 한국 캐스팅 음반에는, 이 노래의 한국어 버전이 내가 한창 좋아했던 시절의 바로 그 ‘샘’이, 내가 즐겨 들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부른 버전으로 실려있다. 하지만 녹음으로 듣는 그 목소리는 어두운 오페라하우스 한 구석에서 앉아(혹은 서서) 듣던 그 때의 감흥을 되살리기에는 어쩐지 뭔가 살짝 부족하다.

 “나는 나, 너는 너. 어쩔 수가 없잖아. 나는 나 너는 너,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이별. 헤어진다는 건 쉽진 않지만 난 그랬지. 나는 나, 너는 너. 그게 최선인 걸.”

 이 노래의 가사는 최선을 다했고, 어쩔 수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는 면에서 ‘난 후회하지 않아Je ne regrette rien’식 연애 회고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예전에는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으므로,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동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뜻 그렇게 말하기 망설여진다. 그 당시에 나는 나름의 논리와 그에 따른 결론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지만, 더 나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 결국 그때 마주친 몇몇 사소한 변수가 내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후회없는 반성은 무책임하다.

 관계에 있어서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예전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노력했고, 좀 더 성숙하고 인정받는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과연 그때의 나보다 나은 사람인가. 토요일 저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으며 최근 내 곁을 오갔던 대화들을 곱씹다가 문득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와 어울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본 내 모습의 차이에 있어서는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처럼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자책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많을지 모르겠지만, 후회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해두어야 한다. ‘후회’하는 순간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는 그런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나치게 후회하며 과거의 불행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후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후회하기 좋은 순간은 늘, 뒤늦게 찾아온다. 때늦은 후회는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앞으로의 선택을 향한 것이다. 적어도 관계의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 하지만, 그 변하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나는 과거 보다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나 너는 너, 어쩔 수가 없지 않냐고,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하는 샘에게 소피는 ‘난 아저씨와는 다르다’고 반박하고는 샘을 홀로 남긴 채 뒤돌아 사라진다. 그 뒤에 다시 이어지는 샘의 후렴구는 자기 변명의 넋두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후회의 표현에 가깝지 않을까. 바로 그 덕분에 샘은 다음 번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껏 후회할 때이다. 그때 너를 잡지 못한 것도, 첫 만남의 알듯말듯한 시선 교환 속에서 당신에게 먼저 손내밀고 말 걸지 못한 것도, 발표를 위해 강의실 앞에 나와 그대들 앞에서 버벅이는 영어로 혼잣말을 해야 했던 것도.

2009/11/29 16:35 2009/11/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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