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밤11시. 이젠 밤마다 주차장이 변하는 아파트 단지 내 배드민턴장에서 바라본 정월 대보름 밤 하늘은 흐렸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고, 보름달은 구름 사이로 간간히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안하던 짓을 하려니까 하늘도 도와주지 않는가보다. 그래도 언듯 비치는 보름달에 간단히 소원을 빌고 친구들에게 ‘더위를 파는’ 전화를 돌린 다음,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나서는 아이팟을 귀에 꽂은 채 단지 안을 조금 걷기로 했다. 이렇게 아파트 단지 안을 걸어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온 것이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고등학교 이후로는 동네를 이렇게 차분히 걸어 다닐 일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최근 3-4년 안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걷다보니 조금 감상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관리사무소 옆을 지나니 농구대가 있는 조그마한 운동장이 보였다. 7-8년전만 해도 밤 늦은 시간까지 농구공 튀는 소리가 들렸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 대신 자동차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는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단지에 차가 늘어 주차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겠지만, 이젠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낮 시간에 다시 운동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더라도 예전에 비해 확실히 뛰어노는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마다 단지 운동장이나 주차장에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공을 갖고 놀거나, 해가 져서 어둑어둑 할 때까지 얼음땡 같은 놀이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아파트 단지에 아이가 줄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이들이 이젠 학원에서 공부하거나 컴퓨터와 노느라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단지 상가를 기웃거리며 예전의 그 가게들이 그대로 있는지를 살펴보고 단지 구석구석에 숨은 놀이터를 한번씩 들러갔다. 변한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안도하고 있는데 문득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를 수상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CCTV 카메라들이었다. 그래, 1-2년쯤 전에 동네에 CCTV를 설치했었지. 예전과 가장 달라진 동네 풍경이 CCTV라니. 처음에는 내 움직임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생각에 좀 불쾌했으나, 며칠 전에 검거되어 뉴스를 가득 메운 연쇄살인범 소식을 생각해보면 현명한 선택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 아파트 단지는 변한 듯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변했다.


Blake's Shadow 전시 도록

Blake's Shadow 전시 도록

 오랜만에 서울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작년 8월 시그마 폴케 전에 갔던게 마지막이었으니 실로 반년만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 전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전시 막판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미술관에 찾아가는 습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매번 올 때마다 조금씩 풍광이 바뀌는 서울대학교 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들어갔다. 미술관에 도착해 길다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리셉션리스트 Y씨가 나의 의외의 등장에 놀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중앙 코어 계단을 향하면서, 며칠 전에 동네를 거닐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꼈다. 한때 참 익숙했었고, 정말로 좋아했던 공간을 오랜만에 둘러본다는 것. 어느새 2년이 흘렀다.

 제6전시실의 전시를 둘러보며 코어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미술관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3층 코어 전시실에 도착하자 김창렬의 ‘회귀 1993’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창섭, 신영상, 정탁영, 문학진.. 조금씩 위치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그림들을 보니 반가움에 마음이 뛰었다. 그중에서도 마치 형제지간 같은 느낌을 주는 정탁영 선생님과 신영상 선생님의 큼지막한 두 그림이 특히 반가웠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전을 보면서는 예상과 다른 전시 구성에 조금 놀랐다. 전시를 보러 오기 전에는 당연히 ‘윌리엄 블레이크 전’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와서보니 블레이크 전이라기보단 블레이크가 영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는 전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영문 전시 제목이 ‘Blake’s shadow’였던 것.) 60여점의 전시작품 가운데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은 열점이 채 안되었고, 나머지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드로잉도 많고, 작은 사이즈의 작품이 많아 포만감이 느껴지는 전시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흥미롭고 좋은 전시였다.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주제에 전시 설명도 충실했으니. 특히 작년에 밀레이 전시를 보고 난 이후 공부해 두었던 라파엘전파가 나올 땐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헌트’, ‘매독스 브라운’, ‘번 존스’에 ‘로제티(언급만 될 뿐 전시된 작품은 없었다)’까지 낯익은 이름들이 하나씩 언급되더니 밀레이의 그림도 등장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조그마한 그림 두 점. 이렇게 또 만나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섹션에는 또 한번 낯익은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현대작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 아니쉬 카푸어는 1991년에 터너 상을 받은 작가로, 다음달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in-i (안무가 아크람 칸과 프랑스여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함께 해 화제가 된 무용공연)에서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작년 8월 in-i 공연 정보를 접하면서 알게 된 작가인데, 이렇게 전시작품으로서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한국작가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MoA Vision 1 전시도 재미있었다. 블레이크의 그림자 전과는 비교될 정도로 큼지막한 작품들이 많았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가는 이지은씨.

 전시를 다 둘러 보고 난 뒤 바깥쪽 계단을 따라 미술관을 다시 한바퀴 돌았다. 동네 아파트단지처럼 미술관도 대체로는 예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미술관은 이제 막 두번째 전시를 앞두고 있었고, 미술관의 많은 공간들이 아직 완전히 정돈되지 못한채 만들어진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낮이 되면 코어 부분 천장에 뚫린 채광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3층 전시실에도 ‘출입문’이나 ‘칸막이’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채 건물 전체 공간이 단절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렘 쿨하스OMA가 이 건물을 설계 했을 때 의도했었던 바 그대로였을 것이다. 지금은 3층 전시실에 칸막이가 있었다. 두개의 전시를 구분하고 전시 동선을 정돈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하 2층에는 카페가 들어섰고 미술관치곤 많이 뚫려있었던 창문들에도 대부분 블라인드나 커튼이 쳐졌다. 코어 천장의 채광창도, 바깥 계단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강당 옆면의 유리창도, 3층 전시실에 뚫린 창에도. 예전에 나는 전시 설명을 마치고 난 뒤 종종 바로 1층 로비로 돌아가지 않고서 미술관 곳곳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3층 바깥계단 앞 창문으로 대학교 정문앞을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느리게 움직이는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고, 2층 강의홀에 앉아있다가 어떤 건축학도를 도와 줄자로 강의홀 사이즈를 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한양대 건축대학원에서 왔다는 그 여학생은 강당이나 연주회장, 공연장의 음향설계를 공부하고 있었는데-당시는 미술관이 완공된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이라 미술전시를 보러온 사람들 만큼이나 렘 쿨하스의 건물을 보러 온 건축학도들이 많았다- 공간의 형태와 재질을 어떤 공식에 넣으면 이 곳의 음향이 어떤지 수치로 알 수 있다고 했었다. 난 당시 공연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기에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엘 크로키(El Croquis)에서 건물을 취재하러 와서, 건물 사진을 찍기 위해 강당 옆면 전체에 드리워진 커튼을 다 올렸던 적도 있었다. 강렬히 내리쬐는 가을 햇빛이 강당을 메우던 그 풍광은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볼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그런 광경일 것이다. 렘 쿨하스가 다시 와서 미술관 공간을 둘러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설계자의 의도는 설계자의 의도일 뿐, ‘비가 샌다는’ 빌라 사브아의 경우처럼 유명한 건축가가 만들었다고 해서 실제로 그 공간을 살아내는 사람들 입장에서 편안하라는 법은 없다. 모든 삶의 공간은 누적되는 일상의 시간만큼 변해간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도, 다른 누군가 살고 있는 그 공간도 매일 하루치의 삶이 보태지며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처음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는 공간이란 다시말하자면 죽어있는 공간일 것이다.

2009/02/15 14:21 2009/02/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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