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편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편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편지가 도착했다. R이 보낸 카드다. 지난해 말 내가 보냈던 크리스마스 카드에 대한 답장이었다. 봉투를 봉한 스티커에는 다니고 있는 대학의 로고가 박혀있었고, 카드는 SF의 스카이라인을 담고 있는 디자인이었다. 예전 아일랜드에 머물던 R을 영국에서 만났을 때도, 아일랜드 풍광을 담은 엽서와 함께 아일랜드 양 떼 그림이 그려진 천 재질의 식탁 매트(place mat)를 선물로 받았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친구인 내게 SF의 한조각이라도 보여줄만한 물건을 일부러 골라 보냈음이 분명했다. “San Francisco의 빛나는 햇살과 바람도 함께 전해지길 바랄께.” 여행을 간 것이 아님에도, 그녀는 그곳에서 여전히 여행자의 마음으로 머무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약 1년 전―2008년 말에 한국을 떠났다. 그의 사정과 내 사정상 최소한 몇 년 안으로는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감안해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이동성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삶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누군가는 “평평해졌다”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실제로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아직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전화를 걸지 않더라도 당장 PC를 켜면 메신저가 있고, 웹브라우저를 띄우면 메일과 싸이월드/페이스북을 통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만― 온라인-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내뱉은 우리의 말은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 뿐, ‘경계’를 넘어 상대방이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도, 닿지는 못하는 것처럼. 적어도 지금 우리가 위치한 삶의 단계에서는 그러하다. 그리고 시간은 갈수록 흐르는 속도를 빨리 하겠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넓지 않은 공간에 빼곡히 담긴 글자들 사이에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공부하는 이의 애환이랄까, 어떤 감상이 숨길 수 없이 전달되어 온다. 요즘 10년지기 친구들이 많이 생각나는데 이곳 학교에서 어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해서 그런 것 같다거나, 돌아가면 반겨줄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거나. 편지를 읽는 시선이 오랜만의 안부인사에서 흔히 접할 만한 말들 위로 물흐르듯 지나가다, “언젠가는 내가 그곳을, 그들을 버리고 떠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잠시 멈춘다.

  물론 나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잘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타향 생활의 외로움이라던가 고난에 지지 않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아마 그는 그런 감상에 휘둘릴 틈도 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어느 때― 지구 반대편을 떠올릴 때가 온다면,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보잘 것 없는 위안이나마 줄 수 있기를. 그로 인해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서로의 삶을 잘 이어나가기를. 서로 떨어져 있는 점과 점 사이를 이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로 그것이, 나 또한 이 인터넷 시대에 내 손으로 편지를 쓰고 직접 우표를 붙여 먼 곳으로 보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경계를 넘지 못하는 내가 경계 너머의 그대에게.

2010/01/26 03:10 2010/01/26 03:10

Trackback URL : http://fom.highwind.kr/trackback/34

  1. 달크로즈의 생각

    Tracked from dalcrose's me2DAY 2010/01/26 03:28 Delete

    “경계”를 뛰어넘는 법.

  1. # 비밀방문자 2010/02/01 00:23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Re: # 달크로즈 2010/02/22 12:44 Delete

      답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번 다시 블로그에 신경을 써야지.. 하고서는 못쓰고 있어요. 대신 이웃분들 글은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소식, 게임 이야기 종종 가서 읽고 있어요. (저도 매번 생각만 하다가 댓글을 못달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저는 오히려 트위터나 미투데이가 아니었으면 블로그에 좀 더 글을 많이 썼을텐데.. 라며 아쉬워 하고 있는 편입니다. 편지, 좋아하는데 써서 보낼 기회는 자주 오지 않네요. 이메일로 보내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내용이 길어지기 마련이고, '남 이야기 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안부인사 고맙습니다. 반가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기 조심하시고, 종종 뵙기를. :)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26 : Next »

Recent Posts

  1. 가만히 혼자 쓰는 편지
  2. “경계”를 뛰어넘는 법
  3. 지금은 마음껏 후회할 때 - Knowing Me...
  4. 어느 여름 날에― 르누아르, 레보비츠, ...
  5. 레퀴엠

Recent Comments

  1. 한방비아그리 호한당 한방정력제 호한... 김여사 2011
  2. 들어가주십시오 女性とのトークで気をつけたい事 2011
  3. 정말. 오랜만이네요 :-) yuna 2010
  4. 답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번 ... 달크로즈 2010
  5.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비밀방문자 2010

Recent Trackbacks

  1. Free animal sex. Free animal sex. 2011
  2. Hetero handjob fan club. Hetero handjob fan club. 2011
  3. Cock torture. Tickle torture. 2011
  4. Ultram. Ultram. 2011
  5. Handjob. Hetero handjob. 2011

Calendar

«   2012/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Bookmarks

  1. - dalcrose님의 미투데이
  2. - Flickr: Photos from dalcrose
  3. - FoM 기록보관소
  4. - tumblr: Under the starlit sky
  5. A Hazy Memory
  6. ADVENTURE_Hardboiled
  7. AMUNT VALENCIA!!
  8. Beautifully Chaotic
  9. Blueforce.NET@TextCube
  10. Cafe Abcb
  11. e n n u i
  12. Electronic Factory
  13. ENHANCED ENHANCED
  14. Heart and Flower
  15. Kei's WAGAMAMA Homepage
  16. Lena's Diaries ver. 3.0
  17. lunamoth 4th
  18. nec spe, nec metu
  19. REd SHAdow
  20. SeeReal.org
  21. The Garden of Everything
  22. the nestmades
  23. Weather Break!
  24. www.suyoung.pe.kr
  25. zlskoq'gelkswlksfvowkaz;lv
  26. 근근한, 근황
  27. 김미들의 불만잡담블로그
  28. 먼지는 어디든 간다
  29. 사은品 세트
  30. 외계인 교차점
  31. 우리는 꽁패밀리!!!!
  32. 이십이세기 다방
  33. 인간이 되고싶은 야옹이란 말이지.....
  34. 인생은 아름다워*
  35. 지요의 뜰
  36. 찾는 물건은 언제나 가방 맨 밑에
  37. 함장의 바다

Site Stats

TOTAL 93831 HIT
TODAY 30 HIT
YESTERDAY 63 HIT
Add to Google
11 명이 RSS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Wikipedia Affiliate Button Support CCCreative Commons License Firefox 3
달크로즈에 의해 창작된 Fragments of Memories 블로그의 모든 내용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BY-SA 3.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