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Posted 2009/06/20 00:42, Filed under: 감상/음악 이야기
헤레베헤의 포레 레퀴엠

헤레베헤의 포레 레퀴엠. Harmonia Mundi France. HMC901771

 헤레베헤1의 포레 레퀴엠 음반을 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과 노제를 시청광장에서 지켜본 뒤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지난 3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살까 말까 고민했었던 음반인데, 결국 이번에 샀다. 아는 이의 죽음이 늘어갈 수록 레퀴엠 음반도 쌓여간다. 나의 첫 헤레베헤 음반. 그리고 내가 산 ‘레퀴엠’ 음반도 이것으로 3종 4개가 된다.

 헤레베헤가 이끄는 포레의 레퀴엠은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어떤 레퀴엠보다도 아름답다.(아직 레퀴엠을 실연으로 들어볼 기회는 없었다.) 웅장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경건함과는 거리가 있는 베르디의 ‘콘서트용’ 레퀴엠 미사나, 경건하다 못해 살짝 우울하기까지 한 그 유명한 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에 비해 포레의 레퀴엠은 ‘그저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듯 하다. 거기에 군더더기와 기름기를 쫙 빼버린 헤레베헤의 스타일은 구조적 아름다움에 더해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지도록 만든다.

In a celebrated statement about his Requiem, Fauré admitted that he saw death ‘as a happy deliverance, an aspiration towards happiness in the hereafter, rather than as a painful transition… Perhaps I also instinctively tried to get away from the well-trodden paths, after accompanying funeral services on the organ for so long! I’ve had them up to here. I wanted to do something different.’ He added, in a letter to Maurice Emmanuel, that ‘my Requiem was composed for nothing… for pleasure, if I may venture to say so!’

- from linernote by Jean-Michel Nectoux

Translation: charles Johnston

 포레의 레퀴엠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런 포레의 생각 때문 아닐지.

 들으면서 한곡 한곡 모두가 참 좋다고 느꼈다. 어두운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아침을 여는 곡으로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그러기엔 ‘죽은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로 시작되는 가사가 너무 무섭기는 하다. 아무렴 어떠랴 싶기도 하지만… –_-) 최근에 들은 성악곡들은 대체로 독주곡이었기에 오랜만에 듣는 제대로 된 합창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헤레베헤가 녹음한 포레의 레퀴엠은 두 종류가 있다. 헤레베헤는 1892년 실제 장례식에서 포레 본인의 지휘로 초연된 오리지날 실내악 버전인 ‘1892 버전(Original version, Madeleine version 이라고도 불린다)’을 1980년대에 녹음했고, 포레가 나중에 콘서트용으로 개작한 ‘1901 버전(1901 version for full orchestra)’을 13년 뒤인 2002년에 새롭게 녹음했다.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잘은 모르지만 라이너 노트에 따르면, 두 버전은 곡의 편성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1892년의 오리지널 버전 대신 1901 버전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이쪽 녹음이 좀 더 최근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다름아닌 앨범 커버의 영향이 컸다. 새카만 바탕에, 가장 아래에는 독특한 모습으로 누운 여성의 조각이 있는 표지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버전의 음반 표지도 인상적이긴 하다. ‘레퀴엠’에 걸맞게 좀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음반을 구입 한 후 확인해보았더니 표지 사진에 담긴 것은 ‘성 체칠리아’라는 작품이었다. 성녀 체칠리아(또는 세실리아)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이자 순교자다. 위키피디어를 항목에서 그녀에 대한 일화를 살펴본 뒤에야 왜 이 조각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체칠리아에게는 뜨거운 열기가 나는 목욕탕에 갇혀 쪄 죽는 처형법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체칠리아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24시간이나 갇혀지냈다.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병사들이 문을 열어보았는데 체칠리아는 죽기는커녕 멀쩡히 살아있었다. 이에 당황한 알마치우스는 이번에는 이전의 순교자들과 똑같이 참수형에 처하기로 다시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형리가 3번이나 그녀의 목을 친 뒤에도 3일 동안이나 모진 고통 속에서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 3개와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자기는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믿고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을 표시하여 자신의 굳센 믿음을 알렸으며, 교황에게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 말을 남긴 후 3일이 지나 4일째 되는 날, 체칠리아는 순교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녀의 유해를 매장하였는데, 821년 교황 파스칼 1세가 그 무덤을 다시 열어 보니, 시신이 조금도 썩지 않고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손가락 형태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교황은 정중히 예식을 갖추어 그녀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봉헌된 성 체칠리아 대성당의 지하 묘소에 안치하였다.

- 위키백과, ‘체칠리아’ 항목에서

St Cecilia's Martyrdom

산타 체칠리아 성당 내 지하 성 체칠리아 묘소에 있는 마데르노의 조각상. 사진 출처는 위키피디어 프랑스어( http://fr.wikipedia.org/wiki/Fichier:Tombeau_sainte_cécile.jpg )

성 체칠리아 조각상 자세히 본 모습

자세히 본 모습. 사진 출처는 위키 피디어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File:St_Cecilia%27s_Martyrdom.jpg )

  표지 속 조각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바로크 조각가라는 스테파노 마데르노Stefano Maderno의 조각 작품으로, 로마에 있는 산타 체칠리아 성당 안 그녀의 묘소에 있는 것이다. 순교 전승이 대부분 그렇듯 조금 으스스하기도 한데, 마데르노의 조각은 그녀의 순교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자세하게 찍은 사진을 보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목에 그어진 금(도끼자국?), 그리고 손가락의 모습2이 순교 설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보니 좀 더 무서워졌다.;
 가톨릭에서 성 체칠리아는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 성인으로서, 흔히 오르간이나 류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3 이 때문인지 브리튼, 스카를라티, 구노, 퍼셀 등 유명한 작곡가들이 그녀와 관련된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성 체칠리아와 포레의 레퀴엠이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음악의 수호 성인’이어서 선택이 되었거나, 단순히 시각적 효과 때문에 선택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녹음에서 헤레베헤는 라틴어의 프랑스식 발음을 채택했고, 포레의 지침에 따라 오르간을 대신해 하모니움을 사용하고 있다. 헤레베헤의 포레 레퀴엠은 전곡 모두가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는 피에 예수Pie Jesu 부터 아뉴스 데이Agnus Dei를 지나 리베라 메Libera me에 이르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하프 소리가 돋보이는 마지막 곡 In paradisum도 빼면 아쉽다. 한곡만 꼽으라면 아뉴스 데이를 꼽겠다.

  1. Philippe Herreweghe는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 겐트 출신의 지휘자다. 그의 이름은 예전(한국에 그가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에르베그’라고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필리프 헤레베헤’ 가 공식적인 표기로 굳어져 가고 있는 듯 하다. 겐트가 네덜란드어권인 플랑드르(플랑드르Flandre는 불어식 표기이고 네덜란드어로는 블람스Vlaams)지방이기 때문에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르는게 맞을 것 같으나 네덜란드어 한글표기법을 잘 모르는 관계로 ‘헤레베헤’가 맞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얼마전 KBS 2TV 클래식 오디세이에서 헤레베헤와 인연이 있는 소프라노 임선혜가 출연했는데, 그녀는 그를 ‘헤레베게’라고 불렀다. 독일식 발음인지? [Back]
  2. 위키백과 한글 항목에는 ‘오른손 3개와 왼손 엄지’라고 나와있는데, 영어 항목에는 그냥 ‘한 손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다른 한손에는 하나만을 펼쳤다(on one hand she had three fingers outstretched and on the other hand just one finger)’고만 나와있다. [Back]
  3. 가톨릭 인터넷 Goodnews 성인정보 - 체칠리아(11.22) 마지막 문단 참조. [Back]
2009/06/20 00:42 2009/06/2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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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골든벨 소녀 2009/06/23 10:25 Delete Reply

    좋은노래 잘듣고 갑니다. 포레레퀴엠 좋아요. 이 CD도 지를듯.ㅎㅎ
    몇일있다 선생님 B단조미사도 하시던데..

    1. Re: # 달크로즈 2009/06/24 18:14 Delete

      골든벨 소녀가 누군가 했었어요. ^_^;
      아아, 저도 헤레베헤 음반 여러개 지르고 싶은데(바흐 칸타타나 미사곡, 브루크너) 돈이 없어서... 흑흑. ㅠ_ㅠ (요즘 돈 없다는 말을 자주하네요. 휴.)

      넵. 모테트 합창단이랑 같이 하는 것 같더라구요. 헤레베헤의 바흐 B단조 미사를 얼른 사듣고 예습을 한 뒤에 공연 보러 갈까 싶습니다. 둘리님 가실 듯 싶은데 혜령님도 함께 하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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